[중혁수영] 슬픔이여 안녕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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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이여 안녕

 (1863회차?) 중혁수영 상실하는 세계의 AU




 무슨 개소리인가. 


 그 순간 한수영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그보다 완벽하게 표현할 순 없을 것이다. 이 정도 반응쯤이야 까만 코트를 외치기 한참 전부터 예상했던 한수영의 입꼬리가 날렵한 호선을 그렸다.



 "너, 어제 이 사거리에 있던 신호등도 딱 그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거든. 그저께 구두점 앞에서도 그랬고. 사흘 전에는…"



 의기양양하던 한수영의 표정이 서서히 굳었다. 남자의 눈빛이 헛소리를 듣는 사람의 무료함에서 스토커를 향한 경멸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범죄자 취급이라니. 소설 속 인물 같은 게 되고 싶은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지금 제 모습은 추리물 속 정의의 사도에 가깝지 않은가. 지극히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한수영은 띠꺼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내가 본 것만 벌써 일주일이야.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길다고."

 "……."

 "맞잖아, 내일 박물관 없어질 거. 이쯤 하면 인정하지?"



 아니면 마저 불러? 입을 꾹 다문 채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의 시선을 받아치듯 한수영이 검은 노트를 펼쳐 들었다. 그 노트에 무엇이 쓰여있는지 잘 알고 있었던 남자가 입매를 일그러뜨렸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는 낮고 무겁게 울렸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다."



 듣는 귀가 많다 이거지. 깨끗하게 납득한 한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종업원이 나이 지긋한 어르신으로 바뀐 카페의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 잡았다. 목소리는 다른 목소리 틈에 숨기는 편이 효과적이니까. 탄산수 두 병을 직접 꺼내와 하나를 남자의 앞에 밀어준 한수영이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남자는 아직도 입을 열 생각이 없는 듯했다. 탄산수 한 병을 비울 때까지만 그의 침묵을 참아주기로 마음먹었던 한수영이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키고, 먼저 입을 뗐다.



 "일단 통성명부터 해. 난 한수영이고…"

 "유중혁이다."

 "그래, 유중혁.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유중혁. 까만 코트보다 훨씬 들어줄 만한 이름이었다. 유중혁은 무엇을, 이라고 의미 없이 되묻는 대신 정물화 같은 시선으로 한수영을 바라보았다. 한수영의 마른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노트의 표지를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톡, 톡, 톡……. 그의 눈동자가 아래로 떨어졌다. 톡. 유중혁은 꿈속의 시계가 멈추기 직전에도 저런 소리를 냈었음을 떠올렸다. 톡.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엎었었다. 톡. 어제와 같은 하루가 지났다. 톡. 꽃을 꺾는 꿈을 꿨다. 톡. 눈을 떴을 땐 세상의 시계가 사라진 후였다.



 "……나는 꿈에서 사라질 것들을 본다."



 초침 소리 같던 소음이 멎었다. 거리에서 유중혁이 한수영을 향해 지었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은 얼굴─그게 무슨 개소리야─로 한수영이 유중혁을 바라보았다가, 금방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가 사라질 존재를 미리 앎은 짐작했었다. 그게 하루 정도의 간격을 두었을 거란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의 꿈은 어떤 형태일 것인가? 금붕어와 동물의 꿈은 얼마나, 어떻게 다르지?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수많은 의문에 떠밀려 반쯤 벌어졌던 한수영의 입술이 다물렸다. 유중혁이 말하지 않은 문장들. 그 침묵 너머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건 오늘 처음 마주한 이가 들춰낼 것이 아니었다. 대신 한수영은 진중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들키면 사람들은 널 가만두지 않겠지, 유중혁. 인류 전체가 나서도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럴걸."

 "알고 있다."

 "차라리 나한테 협력하지 그래? 어디 찌르는 짓은 안 할 테니까."



 유중혁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수영은 미술품을 감상하듯 유중혁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선명한 눈썹에서 콧대를 따라 미끄러진 시선이 뺨에 닿았을 즈음이었다.



 "무엇을 원하나?"

 "글을 쓰려고. 잘 나가는 작가거든, 내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낯을 한 유중혁을 보며 한수영이 한낮처럼 웃었다. 대단하신 인류의 유산도 하루아침이면 전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판에, 의미 있는 행동이 뭐가 있어? 분명 제대로 된 대답이 아니었지만 유중혁은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들은 신호등과 박물관을 잃은 거리에서 만났다. 엉성하게 정한 '달이 남서쪽에 45도로 기울었을 때'라는 약속을 믿지 못한 두 사람이 마주친 시각은 아마도 자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유중혁의 머리 위에 동그랗게 걸린 보름달이 네온사인 없는 거리를 밝혔다. 유중혁은 한수영의 손에 들린 노트와 만년필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의 보폭은 거침없고 넓었지만 뛰다시피 걸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닫힌 우체국 앞에서 멈춰선 유중혁은 내일의 상실을 선언했다. 한수영은 차가운 대리석 계단에 앉아 우표에 대한 기억을 곱씹었다. 마지막으로 우표를 붙여 편지를 보낸 게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그러니 내일은 뉴스도 별말 없겠지. 긴 고민 끝에 한수영이 나이 든 우표수집가의 이야기를 떠올려 냈을 때, 유중혁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검은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 썼어, 유중혁. 가자."



 소리 나게 노트를 덮은 한수영이 계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냉기에 굳은 등을 쭉 펴는 한수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조금 전의 것과 분명 온도가 달랐다. 한수영은 습관처럼 무심코 몇 가지 단어를 떠올렸으나 어느 것도 발음하지 않았다.





 * * *





 한 번 어긋난 약속 시각이 그대로 굳은 채 몇 주가 지났다. 한밤의 밀회는 주로 밤하늘의 끄트머리가 어렴풋이 푸르스름해질 즈음 끝났다. 수십 편의 송덕문이 쓰인 시간 가운데, 유중혁이 가장 우울한 낯이었던 순간은 만두의 상실을 예고했을 때였다. 금은방 앞에서도 지은 적 없었던 표정에 유감이 가득하다 못해 비 맞은 개보다도 처량해 보일 지경이었다. 한수영은 유중혁이 노려보든 말든 배를 잡고 웃었다. 그리고 문이 열린 만두 가게를 찾아 밤새 돌아다녔다. 덕분에 온갖 미사여구를 들이부어 만든 듯한 얼굴에도 익숙해진 한수영은 종종 두 단어를 놓고 그에게 무엇이 나은지 의견을 묻기도 했다. 유중혁의 선택이 반영된 적은 몇 번뿐이었지만.






 * * *






 "내일은 종이다, 한수영."

 "……뭐?"



 언제나 앞서 걷던 유중혁이 어쩐지 제자리에서 말이 없다 싶더라니. 



 씨발. 그의 말을 이해하자마자 한수영은 욕설을 내뱉었다. 겨우 고개를 돌린 것 외에는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좆같음을 달리 갈무리할 생각도 없어보였다. 빈 장이 채 반도 남지 않은 노트를 쥔 손이 창백히 질렸다. 가느다란 떨림이 찬찬히 잦아드는 것을 유중혁은 매일 밤 어딘가를 향했던 눈길로 응시했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든 한수영의 얼굴은 말끔해져 있었다. 괜찮아. 아직 문자는 남아있어.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핸드폰이나 컴퓨터보다 오래 버텼으니, 수필로 기록한 것은 올바른 판단이었다. 매일 무언가가 사라지는 세계에서 한때 존재했던 것들을 증명할 방법은 기억뿐이라는 단안 역시 합리적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기억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단서를 남겨둘 작정이었다. 이왕이면 연약한 인간이 아닌 것을. 한수영은 틀리지 않았다. 다만 한계가 지나치게 선명했다. '아직 문자는 남아있다'는 문장은 '언젠가 문자도 사라질 것이다'라는 문장을 전제하고 있었으므로. 



 그래, 어쩌면 언어까지. 한수영은 처음부터 외면하려 애써왔 제 방식의 한계를 인정했다. 습한 무력감은 좀처럼 떨어지질 않았다. 물에 잠긴 듯한 기분에 젖어 한수영은 사유한다. 애상, 자책, 연민……. 새벽마다 유중혁의 시선에 떠올렸던 단어들은 전부 무용했다. 그는 매일 밤 이런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에겐 별 의미 없었던 가족의 상실도 유중혁에겐 처절했을지도 모른다. 홀로 수백 번을 시도하고, 그만큼의 벽에 부딪혔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만년필과 종이에 기대어 독자를 상정하지 않은 글을 쓴 자신이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우습지 않나? 한수영은 소리 없이 자조했다. 유중혁은 언제나와 같은 얼굴로 한참 말이 없는 한수영을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어느덧 빽빽해진 수첩을 빼앗아 들었다. 



 "……의식하지 않으면 초침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야! 미친, 너 지금 뭐 하는……!"



 듣기 좋게 묵직한 목소리가 둘 사이의 간격만큼 울렸다. 당황한 한수영이 그에게서 제 노트를 다시 빼앗으려는 것을 능숙하게 피하며 유중혁은 글을 읽었다. 정강이를 몇 번씩 걷어차이고도 그의 낭독엔 흐트러짐이 없었다. 결국 자포자기한 한수영이 근처의 난간에 기댄 채 귀를 기울였다. 저 문장은 유중혁이 골랐던 단어로 쓸 걸 그랬나. 한수영이 드문드문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유중혁은 한수영의 글이 냉소적이지 않음을 조금 새삼스러워했다. 한수영이 묘사한 잃어버린 세계는 환하고 다정했다. 추억이 으레 그렇듯이.







 동이 텄다. 지평선을 뛰어오른 빛이 눈꺼풀 너머를 찌르는 감각에 유중혁은 눈을 떴고, 다시 감았다. 눈동자 안에 가둔 빛이 사그라들면 다시 잠들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현실은 꿈속의 꿈에 대한 영화가 아니었기에 꿈과 낮이 몰려드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창가로 다가선 그는 잠들기 전보다 지쳐 보였다. 같은 시각, 한수영은 잠에서 깨자마자 텅 빈 서재와 맞닥뜨렸다. 자신이 이제껏 쓰고 모은 모든 문장이 사라져 있었다. 각오가 소용없는 일들은 언제나 좆같았지만, 어김없이 존재했다. 밖의 거리가 밤사이 얕게 쌓인 눈에 덮여 희고 매끄러웠다. 한수영의 눈에는 그마저도 종이 같이 보였다.



 밤이 깊었다. 유중혁과 한수영은 당연한 일처럼 가로등도, 신호등도 없는 거리에서 만났다. 종이가 없으니 약속도 깨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도. 먼저 와 있었던 유중혁은 빈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은 한수영이 고개를 까딱이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빌딩이 늘어선 거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안 그래도 큰 키 탓에 넓은 보폭이 빠르기까지 하니 도저히 쫓아갈 수가 없었다. 



 "야, 오늘따라 왜 이러는데?"



 참다못한 한수영이 그렇게 외치고 나서야 무언가에 쫓기듯 내딛걸음걸이가 한풀 꺾였다. 한참을 걸어 유중혁은 한눈에 보기에도 높아 보이는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막아서는 이는 없었다. 컴퓨터가 없으니 보안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도 당연한가. 한수영은 사이렌이 울리지 않는 이유 그렇게 이해하려다, 한참 전에 열쇠도 없어졌음을 떠올리고 헛웃음을 지었다. 멀쩡하게 작동 중인 엘리베이터를 보고는 웃지 않았다. 이유가 뭐든 까마득한 계단을 오르는 것보다 훨씬 나았으니까.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새까만 밤하늘이 펼쳐졌다. 유중혁은 어둠 속을 걸어 나가, 잠든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한수영은 난간을 붙잡고 몸을 기울이며 밤바람을 만끽했다. 곁에 선 유중혁의 검은 눈은 형언할 수 없이 아득하고 먼 곳을 응시하는 것 같아서, 한수영은 문득 세계를 홀로 짊어진 장대한 서사시 속 영웅을 떠올렸다. 혜성처럼 그의 시선이 돌아왔다. 유중혁은 가능하다면 영원히 입을 열지 않았을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이면 없어질 거다."



 어두운 빌딩들 사이로 흰 눈발이 흩날렸다. 그래서 내일의 희생양이 뭐냐고 되물으려 벌린 입술 사이로 차갑고 맑은 공기가 밀려들었다. 폐부에 살얼음이 끼는 듯한 감을 느끼며 한수영은 이 순간에도 고요하게 무너지고 있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불현듯 깨달았다. 먼 지평선에서 붉은 빛이 다시 고개를 들 즈음이면 이 모든 것은 새하얗게 지워질 것이다. 불 꺼진 도시도, 그 사이를 헤집는 바람도, 너와 나도. 목이 메거나 눈시울이 뜨거워지진 않았다. 



 "……슬슬 그럴 때도 됐지."

 "……."

 "뭐, 사라지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하…"



 문득 고개를 돌린 한수영의 문장이 멎었다. 시야에 온통 유중혁이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한수영은 영원을 헤매도 그의 검고 깊은 눈동자와 속눈썹이 드리운 섬세한 그림자에 어울릴 단어를 찾긴 어려울 거라 생각했다. 느리고 고른 숨결이 조금씩, 더디게 한수영의 호흡에 얽혀들었다. 어느 순간 무게조차 없이 스치듯 맞닿은 입술에서는 아주 희미한 체온만이 느껴졌다. 


 아, 이제는 유중혁이 홀로 잠길 슬픔도 외로움도 남지 않겠구나. 


 종막을 알아차린 순간의 감정은… 안도, 혹은 해방감과 비슷했다. 한수영은 눈을 감고, 슬픔에게 안녕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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